[단편] 호모와 헤테로 등록자: realkj(김금주) 등록일: 07-12 조회수: 1929 <준영> 그는 여유있게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들어왔다. 모두 환호 하며 그를 맞았다. 강현일의 통산 72번째 굿바이 투런 홈런으 로 스코어는 7 대 6, 우리 학교가 작년에 이어 대학야구 선수 권의 우승컵을 안게 되었다. 대단해. 만년 중하위가 2연패라니. 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다. 그가 빠지고 나면 다시 바닥을 기 게 되겠지. 이 모든 영광이 강현일 한 사람의 능력이었다는 걸 모두가 더욱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존재가 팀의 사 기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도. "준영아." 매표소 앞에서 정호 형이 손을 흔들었다. "그냥 나와도 되는 거냐? 회식 있을 텐데." "나야 빠지건 말건 아무도 신경 안 써. 중요한 분은 MVP잖 아." "너 질투하냐?" "배고파, 형." 그는 평소답지 않게 쾌활한 웃음을 터뜨렸다. 가벼운 걸음 걸이,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태양처럼 찬란했던 강현일이 형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형은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나는 형이 강현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 었다. 느지막히 형과 헤어지고, 집에 와 대충 씻고 누웠다. 피곤했 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3회에 안타를 연속으로 얻어맞고 2점 을, 5회에 홈런을, 6회에 다시 1점을 내줬다. 강판되지 않았다 면 10점도 더 잃었을지 모른다. 한 스포츠 신문은 방어율 5.86 짜리 에이스가 이끄는 팀이 우승한다면 대학 야구사에 길이 남을 진기명기가 될 거라고 했다. 강현일. 고교 MVP였다. 초고교급 슬러거. 선수생활을 끝내겠다고 하며 대학 명문팀과 프로구단의 빗발치는 스카웃 제의를 거절 하고 수능 특차로 입학한 그가, 놀랍게도 우리 야구부에 입부 신청서를 냈다. 그리고 2년간 그는, 내가 5점을 잃으면 6점을, 8점을 잃으면 10점을 찾아왔다. 경멸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 서.... 그 미소는 하위 팀의 에이스였을 때보다 나를 더 비참 하게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어느새 강현 일을 보고 있었다. 부원들이 알아차릴까봐 두려웠다. ...특히, 그가. 내년에 그는 한국과 야구를 떠난다. 다시는...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두 달만 보내면 아무도 상처입지 않고, 아무도 모른 채 무사히 끝날 수 있다. <현일> 그 개새끼는 회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감독까지 내 역전 홈 런에 열광하고 있을 때도, 놈은 무덤덤한 얼굴로 덕아웃에 앉 아 있었다.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그 내시 같은 정혼가 뭔가 하는 단짝에게 가버렸다. 오늘은 내 마지막 시합이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는데, 그 새끼는 보지 않았다. 염병할 우승, 염병할 MVP, 염병할 이준 영! 넌 내가 야구를 그만두든 말든 상관없겠지. 아니, 내가 야 구부에서 없어졌다는 것조차 누가 말해주기 전에는 모를 거 다. 참을 수 없이 울화가 치밀었다. 재크나이프의 날을 폈다 접 었다 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보았 으나 소용없었다. 설령 온 세상이 날 무시한다 해도 너만은 그럴 수 없어. 그 래선 안되잖아? 내게 감사해야 옳은 거 아냐, 응? 빌어먹을 똥통에서 내가 2년씩이나 누구 때문에 썩어줬다고 생각해? 도 대체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냔 말야 새꺄! 전화벨이 울렸다. 받지 않고 있으니 끝도 없이 울어댔다. 홱 수화기를 나꿔채 있는대로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씨팔! 어지간히 하라구!" "어머, 퉁명스럽긴.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화진이었다. "무슨 일이야?" "회식 후에 만나기로 하지 않았어? 바람 맞춰놓고 변명 한 마디 정도는 있어야지." "하고 싶지 않아." "좋아, 강타자. 참아줄께. 대신 내일은 만나는 거야." "끊어." "뭐? 요새 정말 왜 이래?" 전화코드를 뽑아 던졌다. 며칠 시끄럽겠지만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재크나이프를 펴서 불빛에 비춰보았다. 예리한 칼날이 파르 스름하게 빛났다. 나는 이 칼이 마음에 든다. 이준영은 싫어했 다. 저리 치워, 그런 거 갖고 다니지 마. 그 이후로는 쭉 서랍 속에 넣어놨었다. 놈이 날 미치게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늘도 그 꿈을 꾸겠지. 빌어먹을, 그 새끼가 내 인생을 완 전히 망치고 있다. <준영> "감독님이 너 몇 번 찾았다.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 대체 어 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강의실로 달려온 주장이 투덜거렸다. 주말이 지났는데도, 2 학년과 3학년이 같이 듣는 과목의 강의실인 이곳은 온통 우승 과 강현일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다. "어땠어요?" "너 빠져서 김샜을까봐? 꿈깨라 임마. 무지하게 재밌었다." "잘됐네요." "뭐, 잘됐네요오오? 너 임마 단체생활하면서 자꾸 개인주의 로 나가면 곤란해! 지나간 건 그렇다 치고, 이번 주 토요일이 현일이 생일이니까 그날이라도 꼭 와라. 알았어?" "주말은 안돼요." "안되긴, 짜식이!" 뒷문 쪽에서 소요가 일었다. 강현일이 박수와 환호를 받으 며 들어왔다. 그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잔뜩 먹 구름낀 얼굴을 하고 있던 주장이 기분좋게 소리쳤다. "여어, 우리 영웅 오셨군." 내 뒷자리에 가방 던지는 소리가 나고, 책상이 쾅 내 의자 등에 부딪쳤다.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앞에 누가 앉았 는지도 모를 것이다. <현일> 알고 있다. 내가 하는 짓은 유치하다. 대개 스물 한살쯤 먹 으면 관심을 끌려고 뒤에서 책상을 걷어차는 짓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어젯밤에 또 그 꿈을 꿨다. 머리속이 뒤죽박죽이다. 나는 정 신병자, 변태가 돼가고 있다. 이 자식은 어떤 낯짝을 하고 있 을지 보고싶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는다. 수업 내내 한 번도. 한 달전에 민규가 귀국했다. 시즌 중이어서 시간 내기 어렵 다고 하니까 연습장으로 직접 찾아왔다. 국내에 있을 때는 주 먹으로 날리던 녀석이 미국물을 먹더니 여자 엉덩이에만 미쳐 있었다. 일 년에 한두번씩 귀국해서는 다른 수입 오렌지 한 놈과 외제 중형차를 끌고다니며 거리에 널린 골빈 계집애들을 줍는 게 일이었다. 밤 여덟 시가 넘어서야 연습이 끝났다. 민규는 이어폰을 꽂 고 스탠드에 누운 채 발을 까딱거리면서 박자를 맞추고 있었 다. "조개 아작낼 시간에 카사노바가 여기까지 웬일이냐?" "오호, 세 시간도 넘게 지성으로 기다린 친구한테 말하는 싸가지라니.... 이번에 낚은 게 하필 니놈 팬이야. 도대체 대학 야구 같은 것에 웬 팬이 다 있는 거냐?" "그래서 지원사격 해달라고?" "뻐기긴 새끼. 걔 친구들도 하나같이 침대맡에 니 사진 붙 여놓고, 알라여 이런 남자 어디 없나이까 한댄다. 그러니 핑계 좋겠다 이 기회에 떼씹 한 번..." 민규가 말을 멈췄다. 시선이 내 어깨너머에 고정돼 있었다. 돌아보니 이준영이 벗어든 모자로 얼굴을 부치면서 지나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민규가 스탠드에서 뛰어내려 그를 가로막았다. 이준 영은 돌연히 나타난 장애물을 바라보았고, 민규는 경악한 얼 굴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별다른 기색없이 민규 옆을 돌아서 지나갔다. 그가 건물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민규는 시선을 떼 지 않았다. "헤... 야구선수였군. 여기서 만날 줄이야. 그렇게 찾아도 발 자국 하나 없더니." "아는 사이야?" "저 자식 게이바 가수야."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저번에 들어왔을 때, 친구놈이 회원으로 있는 멤버쉽 술집 에 따라갔는데 경치가 색다르더라구. 벽마다 외국 남자배우 누드가 줄줄이 걸려 있고, 여기저기서 남자끼리 더듬수가 한 창이고 말이야. 정말 놀랠 노짜더라니까." "...거기서 노래를 해?" 나는 이준영의 노래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전원이 돌 아가며 부르는 자리에서도 언제나 그는 미소를 띤 채 앉아만 있었다. 언젠가 회식 때, 내 차례 후에 그를 지적하자 4학년 들이 일제히 손사래를 쳤다. 밤새 그래봐라, 그 쇠귀신이 말을 듣는지. 아무튼 빳다 백 대를 넘기면서도 안 부르고 버티는 독종은 그 물건 처음 봤으니까. "목소리가 지독하게 매력적이야. 듣고 있다보면 중독돼버려. 네가 보기엔 어때? 내가 호모냐? 근데 저 자식하고는 해보고 싶어서 환장하겠더라구." "그럼..." "아니, 몸은 안 파신대. 그리고는 증발했어. 다음날 가봤더 니 없는 거야. 육개월에 한 달씩, 그것도 주말에만 일하는데 기간이 끝났대. 이름도 주소도 절대 비밀이고.... 그러니까 즉, 시즌 오프하고 합숙 들어가기 전의 한 달이란 얘기였군. ...젠 장,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날 알아보지도 못하잖아." 그 대화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거의 매일밤 비슷한 꿈이 반 복되었다. 아침마다 팬티를 갈아입어야 했다. 처음에는 그런 꿈을 꾸는 게 충격이었으나 언제부턴가 점차 알 수 없는 흥분 과 쾌감이 싹텄다. 나는 그 역겨운 욕망의 이름을 알고 있었 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준영은 앞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단짝 한테 갔다. 단짝이 웃으며 내게 눈짓으로 아는 체를 했다. 병 신 새끼, 낫살이나 처먹은 놈이 왜 실없이 쪼개는 걸까. 노망 인가? 불쑥, 그가 앉았던 의자에 손을 대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의 체온이 식기 전에 만져보고 싶었다. 나는 그 순간 자리 를 박차고 일어나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남자 둘이 벌거벗은 여자의 다리를 한 쪽씩 잡아 벌려놓고, 어깨에 요란한 문신을 새긴 사내 하나가 여자의 그곳에 딸기 를 밀어넣었다. 한 접시 분량의 딸기가 반은 들어가고 반은 으깨져 입구에 발라졌다. 온갖 지저분한 소리를 해대면서 문 신이 코를 박고 쩝쩝거리며 핥았다. 화진의 얼굴과 목에 홍조가 퍼져 있었다. 치마를 움켜쥔 두 손이 조금씩 떨렸다.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 지만 솔직히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민규 녀석 말대로, 처음 엔 여자 젖꼭지만 봐도 쌌는데 이제는 바로 앞에서 열나게 쳐 대고 있어도 하품만 나오는 것이다. 저기 있는 게 서양년이 아니라 이준영이었다면 어땠을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최대한도로 벌려놓고 처발라준다. 우... 그 자존심 강한 새끼가 어떤 얼굴을 할까. 갑자기 하복부가 뻐근해졌다. 화진을 넘어뜨리고 올라탔다. 용서해달라고 빌어, 건방진 자식아. 날 무시해서 정말 미안 하다고, 이제부터는 날 똑바로 쳐다보겠다고 말해! 입학식 전부터 야구부 코칭 스태프가 찾아왔지만 거절했다. 야구에 미련이 남았다면 약체팀인 이 대학에 올 이유가 없었 으니까. 그러다 4월 초에 우연히 K대와의 친선경기를 관전하 게 됐다. 발레 댄서 같은 얼굴을 한 우리 학교 투수는 위력 없는 슬라이더에 간간히 구질 나쁜 변화구를 섞는 수준이었 다. 나는 꽤나 한심하다는 생각으로 보고 있었으나 점차 집중 하게 되었다. 초반의 대량실점으로 전혀 이길 가망이 없는 경 기를 발레 댄서는 끝까지 전력투구했다. 시합이 종료되고 모두 벤치로 돌아가는데 그만이 마운드에 그대로 서있었다. 모양좋은 엉덩이와 두 다리가 하얀 유니폼 에 싸여 미끈하게 뻗어 있었다. 나는 스탠드에서 내려왔다. 바 로 그때 그가 천천히 돌아섰고, 벤치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나를 발견했다. 그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환히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짙은 속눈썹 아래서 고양이 같은 동그란 두 눈동자 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와! 이게 누구야. 오늘 네가 우 리팀에 있었다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라고 했다. 그는 내 어 깨를 두드리고 옆구리를 꼬집고, 고개를 숙여 땀을 닦는 척하 며 눈물을 훔쳤다. 나는 다음날 입부원서를 제출했다. 지난 일 년간 그는 다정한 선배였다. 그러나 이번 봄부터 나를 보지 않았다. 더이상 말을 걸지 않았고, 내가 옆에 가면 피했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무심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시비를 걸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유학 가기로 결정한 이유 가운데 가 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이준영의 그런 태도였다. ―그동안 수고했어. ―고생이 많았다. ―다 네 덕분이야. ―왜 그만두겠다는 거냐. ―안 갈 수 없는 거냐. ―너와 계속 같이 뛰고 싶다.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었지만, 그는 내게 단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J가 누구야?" 옷을 챙겨입은 화진이 물었다. 초록색 편지지를 들고 있었 다. 어제 온 걸 탁자 위에 던져놓고 잊어버렸다. "몰라. <미스테리 J>야." "거짓말하지 마. 흥, 꽤 열렬한데? 향수까지 뿌리시고... 뭐 어? 당신만을 생각하는 J가? 흐흥...." 하루에 십여 통씩 쌓이는 팬레터 중에서도 확실히 그 초록 색 편지는 극성스러웠다. 올해 봄부터 전지훈련이나 합숙 때 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오고 있었다. 강의실에서 있 었던 일까지 아는 걸 보면 같은 과가 분명한데, 특이한 필체 와 J라는 이니셜 말고는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처음 몇 통은 읽었으나 그 후로는 대개 봉투째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누 군지도 모르는 여자의 감상적인 넋두리나 사랑타령 따위는 딱 질색이었으니까. "이래서 인기많은 남자는 싫다구. 난 평생 네 팬티 검사나 하면서 안달복달하겠지. 말해봐! 지금도 나하고 있지 않은 날 은 딴 여자랑 뒹굴지?" 잘 알면서 왜 묻는 걸까. 그까짓 편지쯤으로 약올라하는 게 우습다. 같이 자는 여자가 천 명이더라도 어차피 결혼은 임화 진과 할텐데. 그만한 집안과 미모는 다시 찾기 힘들다. 놈은 결혼하지 않겠지, 빌어먹을 호모니까. 그렇게도 다정하 고, 웃을 때면 오른쪽 볼에 보조개가 길게 패이는 얼굴을 한 새끼는 외로움이 뭔지도 모를 거다. 한 번도 버려지거나 거절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준영이 노래하는 걸 듣고싶다. 샤워하면서, 옷 입으면서, 머리를 빗으면서 흥얼거리는 소리를 듣고싶다. 날 상대도 안 하는 놈이 그럴 리는 만무지만, 요즘은 계속 그가 내 생일파 티에 와서 축가를 불러주는 상상을 한다. 그때마다 나는 그 구걸 같은 바램에 참을 수 없는 모멸을 느낀다. <준영>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다시는 학교에서 노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3년간 도맡았던 음악제의 피나는 주역도, 합창부의 솔로도, 각종 오락시간의 봉 노릇도, 이젠 제발 그만!" 그후로 는 어떤 회유와 협박 앞에서도 입을 다물었다. 지금 마음 편 하게 명진 형의 카페에서만 노래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때의 다짐 덕분이다. 앞면 녹음을 마치고 목을 가다듬을 때 선우가 찾아왔다. 여행가방을 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었다. "신세 좀 지자." 그는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져놓고 침대에 누웠다. 기타와 흩어져 있는 공테이프들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어? 너 녹음하는 거 처음 보는데?" "너야말로 웬일이야. 태환 형이랑 싸웠냐?" "쳇... 나 찾으면 안 왔다고 해. 한강에 뛰어들러 간다고 써 놓고 나왔으니까." "그러지 마. 형 걱정해." "걱정은 무슨 걱정. 나 죽으면 춤출 거다." 재수하고 있는 선우와 아마추어 복서인 태환 형을 알게된 것은 명진 형의 카페에서였다. 둘은 동거하고 있다고 했다. 사랑은 3년이라고 한다. 그 이후의 생활은 정과 아이, 사회 적 체면으로 유지된다. 단지 애정의 끈만을 쥐고 있는 동성 커플이 유교 사회에서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 만, 솔직히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중 일이야 어떻게 되든 그들은 자신의 욕구에 솔직할 만큼 용기가 있었다. 헤테로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정호 형처럼. 언젠가, 정호 형을 소개시켜달라는 여학생이 있다고 후배 하나가 며칠을 따라다닌 적이 있었다. 몇 번 거절해도 포기하 지 않자 형은 웃으면서, 그러나 진지하게 말했다. 나, 게이야. 내가 여덟 살 때, 맑은 가을날 오후였다. 예쁘게 차려입은 엄마가 보석함을 주었다. 빨간 우단에 싸인, 엄마와 같은 향기 가 나는 그 상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치 맛자락을 잡고 있는 나를 살며시 떼어내며 네 거야, 라고 했 다. 잠시 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며칠이 지나서야 엄마가 멀리, 아주 멀리 떠나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며칠간 혼자서 엄마를 기다렸다. 보석함을 끌어안고 어두운 방안에 앉아 하염없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엄마의 향기는 점 차 엷어져 갔다. 대전에서 올라온 아버지가 강제로 끌어낼 때 까지 울면서 기다렸다. 작년 동계 합숙을 마친 날, 저녁 회식 후에 귀가하던 길이 었다. 왁자하게 떠들어대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저것 좀 봐." 누군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우리로부터 이십 미터쯤 떨 어져 있는 가로등 아래 모피를 입은 키큰 여자가 서있었다. 긴 옷과 짙은 화장으로 가리긴 했지만 침침한 가로등 불빛 아 래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여장남자였다.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가 우리가 힐끔거리자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했다. "뭐야 저건. 서커스하다 나왔나?" "미친 놈 아냐?" 동료들은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워했다.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동료들의 경멸에 찬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뼛속까지 파고 들어왔다. 강현일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말없이 여장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심상찮은 기세에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강현일은 그의 얼굴을 잡아 뒤 통수를 벽에 들이박았다. 무릎이 남자의 옆구리를 찍었고, 연 속해서 날아든 주먹이 입을 부숴놓았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 다.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었다간 죽을 줄 알아." 강현일은 쓰러진 남자의 머리를 걷어차며 나직하게 으르렁 거렸다. 가발이 벗겨진 대머리에서 피가 터져 얼룩진 화장 위 로 줄지어 흘러내렸다. 그 밤 이후로 강현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손만 내밀면 얼마든지 최고의 여자를 가질 수 있는 그가, 한없이 멋진 미래가 펼쳐져 있는 헤테로가 내 마음을 안다면... 폭소 를 터뜨리겠지. 그는 동정어린 보석함조차 남겨주지 않을 것 이다. 두 번 다시 어두운 방안에서 흐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 레포트가 다음 주까지였어?" "몰랐구나. 내가 말 안했나?" "큰일날 뻔했네, 안그래도 찍혔는데. 이 노트는 복사하고, 책 은... 안 쓴 것만 베끼면 되겠는데?" "복사할 것부터 가져가. 책은 지금 정리해서 줄 테니까." "과룸으로 와." 과룸에는 동기 여학생 몇 명과 2학년 대여섯이 모여앉아 잡 담을 하고 있었다. "2학년 수업 있잖아. 땡땡이야?" 내가 묻자 그중 한명이 대답했다. "휴강입니다." 복사기 앞으로 다가서는 나를 동기 여학생이 돌아보았다. "바쁘지 않으면 와서 앉아. 얘기 좀 하자, 오랜만인데." "미안. 무지하게 바쁘다." 다섯 장쯤 복사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무도 없지?" 강현일이었다. "휴강이야. 방황하지 말고 들어와." 2학년생이 말했다. 강현일은 내 뒤를 스쳐 그들에게 갔다. 나는 같은 페이지를 두 번 복사했다. "생일 파티 장소는 정했냐?" "나이트로 할 생각이야. 불만 없지? 장소는 내일 게시판에 붙여놓을 거니까 어지간하면 빠지지 말고 와서 놀라구." 강현일은 나를 힐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머리가 멍해진 채로 거의 복사를 끝마치고 있는데, 정호 형 이 자판기 커피를 두 잔 들고 들어왔다. 내 앞에 하나를 놓으 면서, "어, 많이들 있었구나. 커피 마실래? 내가 뽑아..." 하다 가 말을 멈췄다. 강현일을 발견했을 것이다. 돌아보지 않아도 형의 표정이 어떨지 알 수 있었다. 형은 강현일에게 다가가 커피를 건네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형을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이다. 형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형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는 형을 구할 말을 생각했다. "정호 형, 미안한데 이거 복사 좀 해줄래? 나 빨리 베끼고 가야 하거든." "아, 그래...." 형은 허둥거리며 책을 꺼내다가 가방을 떨어뜨렸다. 강현일 의 발 밑에 가방 속의 물건들이 쏟아졌다. 책과 노트 사이에 초록색 편지지 한 권이 있었다. 강현일은 야릇한 표정으로 초록색 뭉치를 응시했다. 형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서둘러 그것들을 쑤셔넣으려고 하는데 강현일이 손을 뻗어 노트 한 권을 나꿔챘다. 노트를 펴서 들여다보더니 형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글씨첸데." 강현일은 빈정거리듯 말했다. "...돌려줘" 형이 모기만한 소리로 더듬거렸다. 강현일은 노트 든 손을 뒤로 돌렸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에 합숙할 때였는데 말이야" 그는 2학년들에게 말했다. "3학년 선배 몇이서 몰래 술을 마시고는 완전히 꼭지가 돌 아버렸어. 새벽에 이상한 소리가 나서 보니까 그 선배들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엎어놓고 모종의 전설적인 사건을 감행하 고 있더라구. 일명, 후파 사건이었지." "후파라니?" "후장 파열." 형과 나를 제외한 모두가 소리내어 웃었다. 형은 달아올랐 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금 여기에 나한테 후파 당하고 싶어서 죽겠는 누군가가 있는 모양인데, 곤란하지. 아무리 내 귀염둥이가 눈이 없어도 들어갈 데 못 들어갈 데는 구분하니까." 강현일은 씩 웃으면서 건배하듯 커피잔을 들더니 초록색 편 지지 위에 쏟아부었다. 마치 형의 피가 뿌려지는 것처럼 보였 다. 형은 매일 그 종이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어떤 날은 열 장 을 넘기기도 했다. 편지를 쓰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수취인을 잘못 선택했다. 형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과룸을 뛰쳐나갔다. "골치야, 정말로. 지겨운 호모들. 병신들이 꼴에 여자하고도 한다니까." "현일아..." 누군가 그만 하라는 듯한 어조로 불렀지만 강현일은 개의치 않고 계속 이죽거렸다. "그렇게 에이즈 퍼뜨려서 장화 없이는 찔러 총 한 번 마음 놓고 못하게 만들고 말야. 놀려면 지들끼리나 놀 것이지 지저 분하게 남의 여자는 왜 건드리는 거냐구. 안그러냐, 어? 호모 자식아!" 강현일이 빈 컵을 구겨서 던졌다. 컵은 형이 나간 문에 맞 고 떨어졌다.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비열한 놈" 강현일이 나를 쳐다보았다. "뭐요?" "하는 짓이 왜 그렇게 더러워, 형편없는 자식! 어서 가서 정 호 형한테 사과해!"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져 나왔다. 여자 동기들과 후배가 강현일과 나를 번갈아보며 하나둘씩 일어섰다. "선배님이 참으세요." "진정해, 준영아. 너희 그만 현일이 데리고 나가라." "야야, 일어나."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강현일 뿐이었다. 그는 소파 등받이 에 두 팔을 걸치고 왼쪽 무릎에 오른 발을 올려놓은 자세로, 나를 비웃듯이 훑어보았다. "뭘 그렇게 열내요? 선배도 호모요?" 모피 코트의 남자가 구타당할 때 나는 어둠 속에 숨어서 지 켜보고만 있었다. 쓰러진 남자를 모두 돌려가며 걷어찰 때도 그만두라고 하지 못했다. 왜 말리느냐고, 너도 호모냐고 물을 까봐 너무나 무서웠다. "왜 대답을 못합니까? 호모요 아니오?" <현일> 이준영이 나에게 덤벼들었다. 일부러 들으라고 한 도발이었 으나 예상보다 격렬한 급습에 소파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그는 내 멱살을 잡아 일으켜 벽에 밀어붙였다. 왼손이 내 가슴을 누르고 오른 주먹이 배를 쳤다. 대단한 펀치였지만 아 픔과는 다른 감각이 몸 속 깊은 곳을 저리게 했다. 나를 노려 보는 눈과 내 몸을 잡고 있는 손, 얼굴에 부딪히는 거친 숨결 을 느꼈다. 그 염병할 꿈처럼 몸서리치게 자극적이었다. 몇 명이 달려들어 그를 나에게서 떼어냈다. 빌어먹을, 그가 나를 놓아버렸다. 나는 벽에 기대 앉은 채, 그가 다시 덤벼들 어 나를 움켜쥐고 욕을 퍼부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개의 손에 잡혀서 버둥거리다가 잠잠해졌다. 아 랫입술을 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시선을 내리고 단짝 의 책들을 주워서 가방 속에 챙겨넣기 시작했다. "킥킥, 벌써 끝인가? 울고 있는 애인을 달래주러 갈 모양이 지?" "...닥쳐" "에이즈는 어때? 이미 감염됐다고 안심하지 마. 재감염이 더 무서운 거니까." "네 주위의 창녀들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 안심해." 그는 얼음처럼 차갑게 내뱉었다.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 고 등을 돌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다정한 선배였을 때도 난 그의 등을 보는 게 싫었다. 나를 보고 있지 않는 것이 견 딜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무서운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앞으로는 그 어떤 경우라도 이준영의 고양이 눈이 나를 응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준영> 열 시부터 열 한시까지의 스테이지를 마치고 내려오니 태환 형이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정호는 찾았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뇨. 갈만한 데는 다 가봤는데 없어요. 정호 형 어머니가 실종신고하고, 신문에도 내셨다는데 연락도 안오고...." 과룸에서 나와서 형을 찾아다녔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 다. 토요일인 오늘까지 벌써 나흘째 행방불명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이 현일이 생일이다. 꼭 와야 해. 편지지에 커피를 끼얹던 잔인한 미소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데도, 선물을 사서 기타반주로 녹음한 내 노래테이프와 함께 포장했다. '가지 마. 내 곁에 있어 줘. 널 사랑해.' 생일 에 맞추려고 며칠동안 밤새워 만든 60분짜리 테이프 끝에다 그 말을 넣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그 녀석 잘 지내냐?" 태환 형의 돌연한 질문에 뜨끔해서 나도 모르게 더듬거렸 다. "누,누구요? 선우 우리 집에 없는데...." 태환 형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선우라고 안했어." "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 발이 저려 실토해버렸으니 둘러댈 말이 없었다. "다행히 한강은 안갔구나." "......." "양가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한 부부라도 해로하는 건 힘든 일이야. 우리 같은 경우는 더 말할 것 없지. 선우는 점점 못견 뎌하고.... 솔직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태환 형이 한숨을 쉬었다. 선우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나는 할 말이 궁해서 스테이지만 바라보았다. 헤비메탈의 굉음이 절정에 올라 있었다. "저기... 집에 같이 가실래요? 선우도 많이 가라앉은 것 같 으니까 얘기 좀 해보세요." 태환 형은 묵묵히 앉아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방을 집어들었다. 안에 들어 있는 선물이 가슴을 욱 죄었지만, 백번 죽었다 깨나도 강현일에게 건네줄 용기 따위 는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현일> 아버지의 호텔 나이트 중 하나를 전세내서 오후 여섯 시부 터 파티를 시작했다. 친구들과 과의 동기?선후배, 야구부가 대부분 왔다. 이준영은 오지 않았다. 당연히 오지 않을 것이다. 과룸의 일 이후로 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송별회 때도, 출국하 는 날도, 그리고 죽는 날까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놈의 등조차도 볼 수 없겠지. 빌어먹을 새끼, 난 네가 끔찍스럽다. 민규를 불러냈다. "뭐? 주인공이 어딜 가겠다는 거야?" "이준영이 일한다는 게이바, 어디냐?" "짜식.... 너 그런 거 취미없잖아?" "어디야?" "말로 해서는 못 찾아. 게다가 멤버쉽이고." "들어갈 필요는 없어. 너, 저번에 그 새끼랑 해보고 싶다고 했지? 지금도 생각 있냐?" 열 한시 삼십 분이 조금 넘었을 때 이준영이 덩치 큰 사내 와 함께 나왔다. 주차장에는 인적이 없었다. 민규가 차문을 여는 사내를 돌 려세워 다짜고짜 턱에 한 대 먹였다. 뒤따라오던 이준영이 그 쪽으로 달려갔다. 내가 팔을 나꿔채자 돌아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사내도 한가닥하는 듯 싶었지만 민규의 상대는 아니었다. 보통때 같았으면 두고두고 시간을 끌며 떡이 되도록 갖고 놀 았을 텐데 단 몇 방으로 끝냈다. 이준영을 보자 급해진 모양 이었다. 말릴 틈도 없이 뻗어버린 사내를 놈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이러는 거야?" 놈이 질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손님인가? 영업에 지장을 줘서 미안하군. 하지만 뭐, 안심 해. 나도 꽤 돈 많다구." 민규가 길게 뻗은 사내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웃었다. 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는..." "기억하지 못해도 좋아. 하지만 튕기는 건 그쯤 해둬. 돈이 싫다면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이준영이 물러섰다. "미친 짓 하지 마." "쯧쯧, 섭섭한 소리를. 사람을 홀렸으면 책임을 져야지, 응?" 민규가 입술을 핥으며 놈에게 다가갔다. 그 동작이 얼마나 위협적이고 소름끼치는지 아마 그 자신은 모를 것이다. 메고 있는 가방이라도 던지면 될 텐데 놈은 그러지 않았다. 무슨 보물이라도 든 것처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갑자기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쫓아가서 놈의 머리칼을 쥐고 뒤로 잡아챘다. 짧은 비 명을 지르며 홱 끌려왔다. 도망치지 못한다, 개자식아. 넌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그 더러운 욕망을 전염시켜 내 심장을 쥐어짠 대가를 받아야 해. 놈이 나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 팔을 잡아 사정없이 꺾어 올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놈은 고통에 찬 울부짖음 을 토하며 몸부림쳤다. 그 와중에도 가방이 떨어지자 성한 팔을 뻗어 집으려고 했 다. 그 팔을 잡아서 마저 부러뜨렸다. 놈이 바닥에 쓰러졌다. 놈의 몸을 타고 앉았다. 버둥거리며 나를 떨쳐내려고 했다. 턱을 한 대 갈기고 입을 손으로 막았다. 나를 물기라도 하려 는지 입술이 격하게 움직였다. 손바닥을 통해 올라온 짜릿한 전류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재크나이프를 꺼내들었다. 칼날을 눕혀 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놈이 파르르 떨었다. 나는 어느새 발기해 있었다. 하복부와 넓적다리에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의 전율이 스쳤다. 놈의 촉촉한 혀끝이 손바닥에 닿았다. 미칠 것 같은 흥분이 머리속을 뜨겁게 달구었다. 놈의 목덜미에서 피 가 흘러 내 손을 적시고 땅에 흥건하게 고였다.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놈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 뜻했다.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이 만져졌다. 고양이 같 은 두 눈이 공포에 질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일년 전처럼 나 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아름다운 눈이다.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칼을 놈의 심장 위에 댔다. 칼을 빼들었을 때부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민규가 내 어깨를 잡았다. "야 임마, 그만해. 어쩔려구 그래?" 그대로 찔러넣었다. 손잡이가 갈비뼈에 걸렸다. 민규가 외마 디 소리를 지르며 물러섰다. "기분이 어때, 호모새끼야." 나는 속삭이면서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치웠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뭔가를 필사적으로 말하려고 했 다. "...가...가방...가방 안에..." 전신에 경련이 일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얼굴이 하얗게 탈 색되어 갔다. 모든 게 그 꿈과 똑같았다. 단지 놈의 몸에 꽂혀 있는 것이 칼이라는 것만 달랐다. 내 팬티는 완전히 젖어 있었다. 나는 킬킬거리고 웃었다.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져 놈의 얼굴을 적셨다. 나는 그것이 내 눈물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